높은 빌딩들이 끝없이 솟아오른 서울 서소문로를 걷다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길게 굽어 있는 서소문 아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소문 아파트는 1972년에 지어졌습니다. 무려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울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버텨온 이 공간은 이제 단순히 주거공간을 넘어, 도시의 기억을 저장한 하나의 기록 장치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이 오래된 아파트가 가진 매력과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서소문 아파트, 하천의 물길에 따라 휘어진 곡선

서소문 아파트를 처음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바로 건물의 '모양'입니다. 일반적인 아파트처럼 반듯한 직선이 아니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져 있죠.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자리는 원래 서대문에서 용산으로 흐르던 ‘만초천’이라는 하천이 있던 곳인데, 그 하천을 복개(뚜껑을 덮음)한 뒤 그 물길 모양을 그대로 따라서 건물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서소문아파트
출처: 서울역사박물관(공공누리 제1유형)

또한 하천 부지라는 공공 용지 위에 지어져서, 입주민들에게 대지 지분이 없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9층이라는 높이가 꽤나 웅장한 고층이었고, 1층에는 상가가 있고 위층에는 집이 있는 초기 주상복합 아파트의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매일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그 계단실과 긴 복도는 서울이 평면에서 수직으로 변화하던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무척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지안이가 살던 장소

서소문 아파트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건 TV 드라마와 영화 덕분이기도 합니다. 특히 많은 분의 인생 드라마로 꼽히는 ‘나의 아저씨’에서 주인공 지안이 살던 동네의 분위기를 떠올려보세요.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낡은 복도를 지나 차가운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들은 서소문 아파트 특유의 묵직하고 쓸쓸한 분위기와 참 잘 어울렸습니다. 화려한 서울 도심 바로 뒷골목에 이토록 치열한 삶의 현장이 있다는 사실이 시청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죠.

영화인들이 이곳에 열광하는 이유는 '시간의 층위'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넷플릭스 ‘센스8’이나 기타 누아르 영화에서도 이곳은 단골 촬영지입니다. 주변의 빌딩들이 매끈하고 완벽하다면, 서소문 아파트는 금이 간 벽면과 덧칠해진 페인트, 불규칙하게 달린 실외기들이 어우러져 사람 냄새 나는 질감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대비가 감독들에게는 인간의 고립이나 연대를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배경이 되어주는 셈입니다.

거친 콘크리트와 화려한 야경이 만드는 묘한 불협화음

1970년대에는 이곳이 서울의 미래를 상징하는 최신식 주거지였겠지만, 지금은 가장 낡은 곳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주는 아이러니입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낡음’이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오히려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똑같이 생긴 신축 아파트 단지에서는 볼 수 없는 개성과 아우라 때문인 것 같네요.

특히 해가 질 무렵, 아파트 옥상 너머로 보이는 서울 도심의 야경은 정말 환상적입니다. 아파트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노란 불빛과, 그 뒤로 보이는 빌딩 숲은 서울의 두 얼굴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가 앞만 보고 달려오며 놓친 것은 없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풍경이죠. 서소문 아파트는 거친 콘크리트 속에 우리네 삶의 온기를 묵묵히 품고 있는 도심 속 섬 같은 존재입니다.

방문하기 전 꼭 알아두어야 할 것들

서소문 아파트를 직접 보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꼭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곳은 박물관이 아니라 지금도 누군가가 소중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입니다. 50년 전 입주해서 지금까지 살고 계신 어르신들도 많고, 이 분위기가 좋아 들어온 젊은 예술가들도 있습니다. 복도를 걸을 때는 발소리를 죽이고, 주민들의 사생활이 침해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서소문 아파트의 참모습은 눈에 띄는 겉모습이 아니라, 엘리베이터가 없는 불편함을 감내하며 매일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삶과 직접 맞닿아 있다는데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맺음말: 서소문 아파트의 미래

몇 년 전인 지난 2022년 서울시는 '서소문 도시정비형 재개발구역 제 11, 12지구 정비 계획 변경안'을 수정 가결했습니다. 재개발 소식에 서소문 아파트도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곤 합니다. 물론 실제 재개발이 될지, 어떻게  진행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안전을 위해 변화는 필요하겠지만, 서울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곡선의 미학만큼은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런 오래된 건물은 서울이 겪어온 성장통과 영광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원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주말, 카메라 대신 따뜻한 시선을 하나 챙겨서 서소문로의 굽어 있는 시간 속으로 가벼운 산책을 떠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서울의 진짜 깊은 매력을 발견하는 특별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