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부터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피맛골의 이야기를 아시나요? 사라질 위기 속에서 '보존형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았지만, 정작 우리가 알던 그 골목의 정겨움은 사라졌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옛 피맛골을 기억하고 그곳의 음식점을 찾아다니던 사람으로서 아쉬운 마음입니다. 

피맛골, 이름에 담긴 정겨운 역사

피맛골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아시는 분들은 아마도 이 길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느끼실 겁니다. 조선 시대, 종로의 큰길은 고관대작들이 말을 타고 오가던 길이었고, 일반 백성들은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엎드려 예의를 표해야 했습니다. 바쁜 생업 중에 번번이 길에 엎드리는 수고를 덜고자 백성들이 선택한 길은 바로 큰길 뒤편의 좁은 골목이었습니다. '말을 피하는 골목'이라는 뜻의 피맛골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피맛골-먹거리-골목

피맛골은 단순히 통로의 역할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큰길에서 벗어난 이 좁은 길목에는 자연스럽게 서민들을 위한 주막과 밥집이 들어섰습니다. 생선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막걸리 한 잔에 고단한 하루를 씻어내던 이곳은 수백 년간 서울 사람들의 가장 친근한 아지트였습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피맛골 특유의 낡은 나무 탁자와 세월의 때가 묻은 벽면은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었지요.

오피스 유리 빌딩 속으로 들어간 옛길: 보존형 재개발의 시작

대형 빌딩 로비에 박제된 옛길, 보존형 재개발?

2000년대 후반, 종로 일대에 대대적인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피맛골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노후화된 건물을 허물고 현대적인 비즈니스 타운을 조성하려는 계획 앞에서, 낡고 좁은 피맛골은 청산해야 할 과거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민들과 역사학자들의 반대 목소리가 높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보존형 재개발'입니다. 기존의 골목길 형태를 유지하거나, 발굴된 유적을 빌딩 내부로 들여와 보존하는 방식이 채택된 것입니다.

현재 청진동 일대의 그랑서울이나 D타워 같은 대형 빌딩들을 가보면, 건물 내부 혹은 지하에 과거 피맛골의 길 터와 주춧돌, 담장 등이 전시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빌딩 바닥을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 발아래로 조선 시대의 토층을 감상할 수 있게 한 곳도 있습니다. 이는 분명 과거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전면 철거 방식보다는 진일보한 형태의 도시 계획이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역사의 흔적을 현대적 공간 안에 성공적으로 이식한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하지만 오늘날 피맛골을 찾는 이들의 반응은 엇갈립니다. 무엇보다 실제 장소의 상실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됩니다. 보존형 재개발을 통해 물리적인 길의 형태나 현판 등  일부 겉모습은 지켜냈을지 모르지만, 그 길 위에서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삶의 생태계는 처참히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쾌적한 환경과 역사적 가치의 시각화

보존형 재개발의 긍정적인 측면은 명확합니다. 지저분하고 화재 위험이 컸던 노후 골목이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으로 바뀌었습니다. 누구나 쾌적한 환경에서 유적을 관람할 수 있게 되었고, 도심 속 쉼터로서의 기능도 강화되었습니다. 또한, 철저한 발굴 조사를 통해 그동안 몰랐던 조선 시대 생활 유물들이 대거 세상에 드러난 것도 큰 수확입니다. 도심 재개발과 역사 보존이 타협점을 찾았다는 점에서 행정적 성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영혼 없는 골목과 젠트리피케이션

반면, 비판의 목소리는 더욱 뼈아픕니다. 현재 빌딩 속에 '박제'된 피맛골은 더 이상 서민들의 공간이 아닙니다.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와 세련된 식당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생선 굽는 연기와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사라졌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를 '테마파크화'라고 부릅니다. 진짜 삶이 흐르는 골목이 아니라, 과거를 흉내 낸 '세트장'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피맛골의 상징이었던 노포(老鋪)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우리가 알았던 피맛골의 정서는 이제 박물관의 전시물처럼 감상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낡은 건물만이 아닙니다

피맛골의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진정한 보존이란 무엇일까요? 건물의 외형이나 길의 모양만 남기는 것이 보존의 전부일까요? 도시는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습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활동과 문화, 그리고 세월이 쌓아 올린 공기가 결합할 때 비로소 그 공간만이 주는 기억이 형성됩니다.

피맛골의 보존형 재개발은 '물리적 보존'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문화적 보존'과 '사회적 보존'에서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빌딩 로비의 유리 바닥 아래 갇힌 옛길은 마치 박제된 동물을 보는 듯한 쓸쓸함을 자아냅니다. 앞으로의 도시 재생은 단순히 유물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그 공간의 주인이었던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가 어떻게 새로운 환경 속에서 계속 숨 쉴 수 있을지를 더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지금 종로를 걷게 된다면, 거대 빌딩 숲 사이 어딘가에 숨겨진 피맛골의 흔적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도시의 가치는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