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동의 가파른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화려한 대저택들 사이에서 소박한 한옥 한 채를 만나게 됩니다. 심우장이라 불리는 이곳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생애 마지막 11년을 보낸이죠. 보통의 한옥이 따스한 햇볕을 받기 위해 남향으로 짓는 것과 달리, 이 집은 북쪽을 향해 있습니다. 흔치 않은 북향한옥인데요,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성북동 심우장은 왜 북향인가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은 '배산임수(背山臨水)'와 '남향(南向)'입니다. 배산임수는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며 기운을 얻는 것이고, 남향은 채광과 통풍을 극대화하여 거주자의 안락함을 돕는 실용적인 지혜입니다. 그러나 심우장은 이 문법을 따르지 않았지요. 심우장이 지어진 1933년, 만해 선생은 왜 스스로 불편한 북향집을 택했을까요?

그 이유는 단호하고도 명확했습니다. 당시 서울의 심장부였던 경복궁 앞에는 일제의 권력을 상징하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만해 선생은 "남향으로 집을 지으면 조선총독부 건물을 마주 보게 되니, 차라리 볕이 들지 않는 북쪽을 보며 살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일제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한 인간의 지독한 저항을 건축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겨울이면 북풍한설이 몰아치고 여름이면 습기가 차는 불편함보다, 민족의 원수를 매일 마주해야 하는 정신적 고통이 그에게는 더 컸던 셈입니다.

심우(尋牛)에 담긴 수행의 삶과 절개

심우장이라는 이름은 불교의 '십우도(十牛圖)'에서 유래했습니다. 십우도란 잃어버린 소를 찾는 과정에 비유하여 본성을 깨달아가는 수행 단계를 설명하는 그림입니다. 여기서 '심우(尋牛)'는 첫 번째 단계인 '소를 찾아 나서는 마음'을 뜻합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었던 한용운 선생은 이 작은 공간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지키고,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정신적 수행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건물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의 삶이 얼마나 청렴하고 강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단 다섯 칸의 방으로 이루어진 심우장은 화려한 장식 하나 없이 단출합니다. 그는 이곳에서 잡지 '불교'를 발간하며 민족 의식을 고취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교류하며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그가 겨울에도 방에 불을 때지 않고 지냈다는 일화입니다. 감옥에 있는 동지들이 추위에 떨고 있는데 자신만 따뜻하게 지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심우장의 차가운 공기는 곧 그가 지키고자 했던 서슬 퍼런 절개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마당의 향나무와 검소한 내부 공간

심우장 마당 한쪽에는 만해 선생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향나무 한 그루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을 견디며 심우장을 지켜온 이 나무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향기를 잃지 않는 선비의 기상을 닮아 있습니다.

심우장-전경과-마당의-향나무

공간은 매우 협소하지만, 그 안에서 <님의 침묵> 이후의 문학적 고뇌와 독립에 대한 논리적 사유가 완성되었습니다. 

소박한-심우장-내부

방 한쪽 벽면에 걸린 친필 서체와 유품들은 당시의 긴박했던 시대 상황과 만해의 내면세계를 시각적으로 전달합니다. 관람객들은 이 좁은 방에서 그가 느꼈을 외로움과 동시에, 그 외로움을 뛰어넘는 거대한 정신적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화려한 궁궐보다 심우장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이 더 큰 이유입니다.

성북동 골목 끝에서 만나는 서울의 역사적 정체성

서울이라는 도시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때로 옛 흔적을 지워가고 있지만, 심우장을 바라보면, 시대를 앞서간 한 지식인의 정체성과 조우하는 기분이 듭니다. 서울의 역사와 그 정체성은 새로 올리는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이런 곳에서 만날 수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일제 치하의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지키려 했던 그의 고집스러운 삶은, 오늘날 우리가 쉽게 포기하거나 타협하는 많은 가치에 대해 경종을 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