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의 뒤쪽으로 조금만 발걸음을 옮기면 매봉산 안쪽으로 거대한 철제 건물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마포 석유비축기지로 원래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국가 1급 군사보안시설이었지요. 저도 다녀왔는데요, 월드컵경기장과 정말 가까워서 놀랐습니다. 또, 이곳이 월드컵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그 전에는 몰랐던 사연인데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는지 자세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41년간 봉인되었던 탱크가 문화비축기지로

문화비축기지의 이야기는 1973년 중동전쟁의 여파로 시작된 제1차 석유 파동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에너지 안보라는과제 앞에 정부는 서울 시민이 한 달 동안 쓸 수 있는 양의 석유를 저장하기 위해 고심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깊은 숲이었던 마포 매봉산 안쪽에 석유저장용으로 5개의 거대 탱크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이곳은 철저한 격리 구역이 되었습니다. 인근 주민들조차 그 담벼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이 비밀스러운 공간의 운명을 바꿔놓았습니다. 경기장 바로 옆에 대규모 유류 저장고가 있다는 사실이 위험 요소로 지목되었고, 결국 석유를 모두 비운 채 폐쇄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로부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숲속에서 노후화되어가던 탱크들은 철거의 위기 앞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서울 시민 아이디어 공모로, 서울시는 이 낡은 구조물을 부수는 대신, 외형을 보존하며 새로운 가치를 담기로 했습니다. 2017년, 버려진 산업 시설은 문화 비축기지 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어 돌아오게 됩니다.

차가운 철제 탱크에 불어넣은 건축적 생명력

마포 문화비축기지의 가장 큰 매력은 과거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디자인의 핵심 요소로 활용했다는 점입니다. 건물의 뼈대는 유지하면서 그 쓰임새만 완전히 바꾸어 리모델링 한 것입니다. 기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6개의 탱크(T1~T6)는 저마다 다른 목적으로 설계되어 방문객에게 다채로운 공간감을 선물합니다.

마포문화비축기지-현재모습

'T1 파빌리온'은 탱크의 철제 외벽을 걷어내고 투명한 유리를 입혀, 매봉산의 암반이 실내로 쏟아져 들어오는 듯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반면 'T3'는 석유비축기지 당시의 거친 모습을 그대로 남겨두어, 우리가 이곳의 역사를 잊지 않도록 기록하는 '시간의 박물관' 역할을 합니다. T4는 공간 내부에 영상과 음향 설비가 설치되어 미디어전시와 같은 다목적 전시를 가능하도록 설계했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공간인 'T6 커뮤니티 센터'는 다른 탱크들을 해체하면서 나온 고철판들을 재활용해 지은 건물로, 과거의 자재가 새로운 건축물로 이어지는 자원 순환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붉은 녹이 슨 철판 사이를 걷다 보면, 낡은 것이 주는 위로와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화석 연료의 흔적 위에 틔워낸 초록빛 생태 가치

이곳이 건축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생태적 철학 때문입니다. 과거 화석 연료인 석유를 담고 있던 공간이 이제는 태양광, 지열, 빗물을 이용하는 지속 가능한 에너지의 중심지로 변모했다는 점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이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 도시의 모델을 미리 보여주는 듯합니다.

실제로 공간을 걸어보면 건축물이 숲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숲의 일부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매봉산의 원래 경사를 그대로 살리고, 거대한 콘크리트 옹벽을 무대로 활용하며, 빗물을 모아 공원 용수로 사용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이러한 생태적 설계는 방문객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줄 뿐만 아니라, 기후 위기 시대에 도시가 가져야 할 방향을 보여줍니다. 기계 소리가 멈춘 자리에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채워지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태 예술인 셈입니다.

결론: 낡은 유산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서울

우리는 흔히 개발을 이야기할 때 낡은 것을 밀어내고 새것을 만들어내는 속도전에 집중하곤 합니다. 하지만 마포 문화비축기지는 조금 느리더라도 과거를 기억하고 그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입히는 것이 얼마나 풍요로운 결과를 만드는지 증명해 주었습니다. 거대한 석유 탱크 안에서 울려 퍼지는 공연 소리와 탱크 사이를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가진 회복력과 포용력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포 문화비축기지는 우리가 잊고 지냈던 도시의 기억을 비축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준비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이 남겨놓은 노후화되고 있는 유산들을 어떻게 재탄생시킬 것인지 이정표가 될만한 서울의 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은 리노베이션이 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홍보가 되지 않아 방문객들이 생각보다는 적었다는 점입니다. 서울시에서 홍보와 관리에 더욱 힘써주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