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후암동, 남산의 가파른 기슭을 따라 촘촘하게 지어진 낡은 집들 사이로 길게 뻗은 계단이 하나 있습니다. 해방촌 108계단이라 불리는 이곳은 오늘날 많은 관광객과 사진작가들이 찾는 명소이자, 드라마의 단골 촬영지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계단은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가장 아픈 근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억압적 통치 수단에서부터 해방 후 서민들의 치열한 생존 현장으로 변모해온 108계단의 역사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용산 해방촌, 신사참배의 길이었던 108계단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신사 참배
해방촌 108계단의 역사는 194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한반도를 무단 점령하고 있던 일제는 태평양 전쟁의 전사자들을 추모하고, 조선인들에게 황국신민화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남산 기슭에 '경성호국신사'를 건립했습니다. 이 108계단은 신사로 올라가기 위한 진입로, 즉 신사참배의 길로 조성되었습니다.
건축적 특징에 숨겨진 지배의 의도
108계단은 설계 당시부터 남산의 지형을 이용해 매우 가파르게 만들어졌습니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볼 때 신사가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일제 권력의 위엄을 과시하려 했던 것입니다. 당시 일본은 전쟁 동원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정신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높은 곳에 신사를 짓고 민중들이 고개를 숙이며 가파른 계단을 오르게 한 것은 시각적, 심리적 압도감을 주기 위한 고도의 통치 전략이었다고 합니다. 계단 한 칸 한 칸에는 억압받던 민족의 한과 눈물이 서려 있습니다.
비극의 계단에서 희망의 길로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후, 억압의 상징이었던 경성호국신사는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철거되었습니다. 주인 잃은 신사 터와 그 주변으로는 갈 곳 없는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월남민과 해외에서 귀환한 동포들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이 마을은 '해방된 동네'라는 뜻의 '해방촌'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수탈의 길에서 생존의 길로의 전환
신사 참배를 위해 닦였던 가파른 108계단은 이후, 해방촌 주민들의 일상을 지탱하는 생명선으로 바뀌었습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계단 주변에 판잣집을 짓고 터전을 잡았습니다.
해방촌의 공동체 문화와 계단의 역할
좁은 골목길과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에서 108계단은 마을의 광장 역할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계단을 놀이터삼아 놀았고, 어른들은 계단에 앉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고단한 하루를 달랬습니다. 식민 통치의 도구였던 공간이 주민들의 따뜻한 공동체 공간으로 정화된 셈입니다.
경사형 엘리베이터의 설치와 도시 재생
세월이 흘러 해방촌에도 현대화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가파른 108계단은 역사적 가치는 높았지만, 이곳에서 평생을 보낸 고령의 주민들에게는 일상적인 이동에 큰 불편을 주는 장애물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서울시는 도시 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2018년, 이 계단 중앙에 경사형 엘리베이터를 설치했습니다.
역사 보존과 주민 편의의 공존
처음 엘리베이터 설치 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역사의 흔적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108계단은 그 형태를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중앙에 엘리베이터를 배치하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제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동시에 해방촌만의 새로운 매력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도시 재생의 사례로 거듭난 해방촌
최근 108계단 주변에는 예쁜 카페와 공방들이 들어서며 젊은 세대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계단에 서린 역사를 그대로 남겨두면서 주민의 편의를 더한 시도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엘리베이터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해방촌의 전경은 방문객들에게 이곳이 겪어온 시간을 시각적으로 전달합니다.
기억해야 할 흔적, 잊지 말아야 할 역사
계단 곳곳에는 이곳이 과거 신사의 진입로였음을 짐작게 하는 흔적들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흔적들을 지우지 않고 보존하는 이유는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계단을 통해 식민 지배의 잔혹함과 이를 극복해낸 우리 선조들의 인내를 동시에 배울 수 있습니다.용산구는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으며, 이는 108계단이 미래에도 지속 가능한 역사 문화 자산으로 남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용산 해방촌 108계단은 비극적인 탄생으로 시작되었으나, 우리 민중의 삶에 의해 희망과 끈기의 공간으로 재탄생한 곳입니다. 가파른 계단 한 칸 한 칸을 밟아 올라가며 숨을 고를 때, 우리는 80여 년 전 이 길을 걸었을 누군가의 고통과 해방 후 이곳에 희망을 심었던 사람들의 숨결을 느낍니다. 해방촌을 방문하신다면 단순히 예쁜 풍경만을 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계단이 묵묵히 견뎌온 시간의 무게를 함께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